원시적인 세계와 어울리지 않게 등장하는 거대한 문명 제국의 모습은 <10,000 BC>에서 이질적인 볼거리지만 그만큼 색다른 재미를 준다.

(이 기사는 시사 일정상 영화를 보지 않은 상태에서 작성된 것입니다.)

문명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야생의 시대. 거대한 맘모스와 검치호랑이 등이 대지를 활보하는 가운데 인간 또한 야생의 본능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다. 젊은 청년 들레이(스티븐 스트레이트)는 에볼렛(카밀라 벨)과 사랑을 키워가지만 부족을 급습한 낯선 전사들에게 에볼렛을 납치당한다. 살아남은 이들과 세를 규합한 들레이는 그녀를 찾기 위해 먼 여정을 떠난다. 마침내 당도한 낯선 부족의 땅. 거대한 피라미드가 존재하는 그곳은 문명이 태동한 곳으로 납치당한 들레이 부족 사람들은 이들의 노예가 되어 비참한 생활을 견디고 있다. 강력한 부족을 형성한 이들 악의 세력에 맞서는 들레이. 부족의 미래를 놓고 야만과 문명이 하늘을 향해 솟아 있는 피라미드에서 최후의 결전을 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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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펜던스 데이> 이후 롤랜드 에머리히는 ‘규모’에 올인하고 있는 듯한 인상이 강하다. 특히 <고질라>에서 ‘중요한 건 크기다’(Size does matter)라고 일갈한 후 그의 작품은 <패트리어트> <투모로우>를 거치면서 블록버스터 중에서도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해왔다. 그런 혐의에 비추어볼 때 선사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10,000 BC>는 멜 깁슨 감독의 <아포칼립토>(2006)의 원초적 세계를 더 크게 확장하겠다는 또 하나의 원초적 야심처럼 비친다.

출발은 소박했다. “모닥불을 가운데 두고 사람들이 주고받는 옛날이야기에 관심이 많았다”는 롤랜드 에머리히의 말처럼 미지의 제국에 맞서는 젊은 영웅의 이야기는 고전적이지만 단순하다. 원래 그의 작품은 이야기 자체가 풍부했던 적은 없었다. 롤랜드 에머리히에게 있어 이야기는 거대한 볼거리를 보여주기 위한 최소한의 뼈대에 불과했다. <10,000 BC>에서도 서사가 있는 주요 정보는 초반부에 모두 노출되고 그 이후 극을 이끄는 것은 5m가 넘는 거대한 몸집의 맘모스, 송곳니의 길이가 무려 20cm에 이르는 검치호랑이 스밀로돈과 같은 야생의 동물과 들레이 부족, 노예사냥꾼 제국이 벌이는 엄청난 규모의 전투다. 롤랜드 에머리히가 늘 단신으로 적진에 뛰어드는 영웅의 이야기에 관심이 많은 건 볼거리의 규모를 최대화하기 위한 최적의 설정이기 때문이다. <10,000 BC>에서도 가장 눈길을 끄는 장면은 맘모스 떼와 홀로 맞서는 들레이의 모습이나 그가 광활한 사막 위에 홀로 서 있는 광경 등 상대적으로 스펙터클을 돋보이게 만드는 구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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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위해 제작진이 신경을 쓴 건 태초의 세상과 가장 닮아 있는 로케이션 장소와 거대 고생물들의 재현이었다. 살인적인 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뉴질랜드의 와이오라우 스노우 팜과 건조하고 무더운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의 정글(이 중 스피츠코네(Spitzkoppe)라는 곳은 스탠리 큐브릭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촬영장소이기도 하다), 그리고 아프리카 나미비아의 끝이 보이지 않는 사막을 촬영지로 선택한 건 그래서다. 원시적인 자연의 모습이 블록버스터에 어울리는 규모의 공간으로서 적합했을 뿐 아니라 신화의 세계가 주는 영적인 느낌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생물만큼은 시각적 상상력을 극대화하는 쪽을 택했다. “당시를 드러내기 위한 이야기와 장소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와의 균형이었다”고 말하는 롤랜드 에머리히는 우리에게 익숙한 동물의 모습을 통해 고생물을 부활시켰다. 거대한 생명체들이 단순히 둔하게만 보이기를 원치 않았던 제작진은 생동감을 얻기 위해 코끼리, 타조, 호랑이 등의 움직임을 동영상에 담아 컴퓨터그래픽에 대입했다. 무게가 500㎏ 이상 나가는 식인새 포루시드하시드의 경우, 타조의 다리가 파괴적이라는 사실에 착안해 그대로 재현해냈다.

원시적인 세계와 어울리지 않게 등장하는 거대한 문명 제국의 모습은 <10,000 BC>에서 이질적인 볼거리지만 그만큼 색다른 재미를 준다. 야생의 환경에 익숙한 들레이와 에볼렛의 눈에 비친 문명의 모습, 즉 거대한 제국의 이정표에 다름 아닌 피라미드가 처음 보는 놀라움으로 다가오듯 관객에게도 길게 늘어선 피라미드의 모습은 생소하다. “‘신들의 산’으로 등장하는 피라미드는 지금껏 그 누구도 보지 못했던 건축물로, 만드는 입장에서도 흥미로웠다”는 게 제작자 마이클 위머의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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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을 파괴하는 건축물인 만큼 촬영법 역시 평소와 달라야 했다. 정면에서 촬영하는 것보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촬영법이 피라미드의 규모를 살릴 수 있었기에 촬영진은 ‘스파이더캠’(Spydercam)을 고안해냈다. 이는 <스파이더맨>의 ‘와이어캠(Wirecam)’에서 한 단계 진보한 촬영방식으로 일직선으로 이동하는 방향의 촬영만이 가능했던 <스파이더맨> 때와 달리 <10,000 BC>의 스파이더캠은 360도 회전촬영이 가능해졌다. 헬리콥터에서 촬영한 것과 같은 효과를 내는 스파이더캠으로 인해 에머리히는 “구식의 이야기와 볼거리를 첨단의 기술로 결합한 마술적인 볼거리를 완성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새로움과 옛것, 야생과 문명의 대비는 <10,000 BC>의 분위기를 규정하는 결정적인 요소다. 선사시대의 이야기지만 야생과 문명의 충돌이 대결구도를 이루고 그 과정에서 다큐멘터리에나 어울릴 듯한 자연과 그 속에 어우러진 등장인물들의 모습은 낯선 세상에서 영웅을 등장시키는 블록버스터를 가능케 했다. 또한 수백억 원의 제작비가 소요되는, 나미비아 사막 같은 촬영현장의 경우 변변한 호텔을 찾지 못해 천막을 치고 그 안에서 생활할 수밖에 없었던 환경은 배우들에게 선사시대의 일상을 경험케 했다. “독특한 경험이었지만 영화 속 들레이의 모험처럼 이런 생활 역시 영화를 구성하는 모험 중 한 부분에 불과했다”는 들레이 역의 스티븐 스트레이트의 말처럼 배경은 기원전 10,000년이지만 영화가 주는 교훈은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유효하다. 사랑의 힘을 통해 위기를 극복하는 기적, 인간관계가 만들어내는 이성과 비이성의 대립 등은 시대를 관통하는 원초적인 요소임이 틀림없다. 물론 지나치게 강조되는 영웅의 모습이 지극히 미국적이긴 하지만 이를 걷어낸 자리에 남아 있는 인간의 다양한 감정은 묵직한 인상을 남긴다. 롤랜드 에머리히의 초대형 프로젝트 <10,000 BC>가 지닌 영웅 들레이의 특별한 모험담은 알고 보면 소박한 삶에 관한 이야기이도 하다.

허남웅 기자

Posted by 불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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